▶을미사변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삼)의 지휘 아래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새벽 일본군과 경찰·낭인배 등이 경복궁을 기습, 민비(문비:1897년 명성황후로 )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일본의 국제적 만행. 청일전쟁의 승리 후 일본은 마관조약(馬關條約)통하여 청나라에 배상금을 부과시키고 요동반도·대만·팽호도 등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침략을 경계한 러시아가 독일·프랑스 등과 함께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게 되자, 삼국의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환부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한 조선정부내에서는 청일전쟁 이래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여하여 온 일본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개혁노선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이때 왕실과 친로인사들은 러시아공사인 베베르(Waber, K.)와의 비밀접촉을 통하여 '인아거왜책(引俄拒倭策)'을 시도하였다. 당황한 일본측은 러시아에 조선분할안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300만원 기증금 제의설로 조선왕실을 매수하려 하는 등 어떻게든 조선에서의 패퇴만은 막아보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초조하여진 일본정부에서는 조선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감퇴하는 것을 감지하고,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정상)를 소환하였다. 대신 그의 추천을 받아들여 외교에는 무지한 예비역육군중장 미우라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의 모종의 음모를 실현에 옮기고자 하였다. 즉, 그를 통하여 궁중의 실세이자 조선의 대로접근을 주도한 인물인 민비를 제거하여 조로관계(조로관계)의 접근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하려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미우라는 참선승(參禪僧)을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공사관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를 통하여 은밀히 민비제거계획을 짰으며, 마침내 8월 16일(양력 10월 3일)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를 중심으로 스기무라, 오카모토(岡本柳之助), 포병중좌(포병중좌)인 구스노세(楠瀨幸彦) 등이 흉계의 실행방안을 확정하였다.

   처음에 이들은 민비와 정적관계에 있던 대원군을 종용하여 가담시키고, 행동대로는 해산설이 나돌던 조선군훈련대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만을 이용하여서는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병력을 행동대의 주축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 낭인배·경관·사인을 끌어들이고 조선정부에 고빙되어 잇던 일본인 고문관·신문사 사장·기자·통신원까지 가담시켰다. 아울러 해산설로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 등을 끌어들이고, 거사일 새벽 공덕리 별장에 있던 대원군을 종용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호위 아래 궁성으로 향하였다. 당초 8월 22일이 예정일이었으나 음모가 누설될 것을 염려한 이들은 8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행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궁궐을 공격하여 들어가자 궁성에서는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安 壽)가 1개 중대의 시위대병력을 이끌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홍계훈은 일본군 장교의 총격을 받아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병력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무너졌다. 이들 폭도는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가 국왕의 침전(寢殿)인 곤녕전(坤寧殿)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였다. 공포에 질려있던 고종과 왕태자에게 세명의 일본인 폭도가 난폭한 행동을 하였는데, 이들 중 하나는 제복 입은 일본군 장교였다. 왕과 왕태자의 옷이 찢어졌고, 상투를 잡힌 왕태자는 폭도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얼마 후 왕태자가 깨어나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칼등에 맞은 때문이었다.). 한편,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왕비의 침전에 난입하는 폭도들을 달려가 막아서다 그들의 총탄에 맞았고, 이내 고종이 보는 앞에서 폭도의 칼을 맞고 절명하였다. 그리고 왕비와 함께 내실에 몰려 있던 궁녀들이 일본군 장교와 순사, 그리고 낭인배의 칼에 쓰러졌고, 마침내 왕비도 왕태자를 부르며 그들의 칼날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들은 왕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근처의 녹원(鹿苑) 숲속으로 옮겨가 석유를 붓고 그 위에 장작더미를 올려쌓은 다음 불살라버렸다.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타고 남은 재를 우물에 빠뜨리고, 일부는 묻어버렸다. 폭도들에 의하여 이러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 수비대병력은 궁궐의 각 문을 파수하며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궁궐은 일본군 수비대와 이 사건에 이용된 훈련대에 의하여 장악되었고, 목적을 달성한 폭도들은 궁궐을 빠져나갔다.

   고종은 일본공사에게 사태수습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우라가 입궁하였고 앞서 조직된 내각의 인물들이 교체되어 주로 친일파인물을 중심으로 내각이 급조되었다. 전적으로 미우라의 의도와 지지기반 위에 성립된 친일내각이었던 것이다. 미우라는 당시의 사태를 훈련대에 의한 궁문돌입사건(宮門突入事件)으로 몰고가면서,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훈련대 난동시 일본인이 혼입(混入)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사실여부를 규명하여줄 것을 외부에 요구하는 등 위장된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자시의 지시에 의하여 시해된 왕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게 하였다. 결국 당시의 내각에 의한 조처는 어디까지나 을미사변 직후의 공포분위기에서 미우라의 각본에 따라 취하여진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사건발생 때 궁궐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 구문 다이(Dye,W.M., 다이)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Sabatin,G.)이 이미 사태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였던 점이다. 이들에 의하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미국대리공사 알렌(Allen,H.N.) 등 각국 외교관들에게 사태의 진상이 즉각 폭로되어 미우라의 사건은폐작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의 진상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일본은 국내외로부터 빗발치는 여론의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달은 일본정부는 고무라(小村壽太郞)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조선에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체하였다. 또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王室問安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여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이어 곧바로 미우라와 스기무라를 비롯, 오카모토·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기쿠치(菊池謙讓) 등 외교관·고문관·순인·순사·신문기자·낭인배 모두에게 퇴한명령을 내려 거의 50인에 이르는 자들을 이로시마감옥(廣島監獄)에 수감하였다. 잠시 국제여론의 비판을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서울주재 외교사절들의 항의에 의하여 그동안 일본공사의 위세 아래있던 김홍집(金弘集)내각에서도 문제가 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폐서인이 된 왕비를 복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측에게 유리한 사건이 하나 돌발하여 사태를 역전시키게 되었다. 바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양력 11월 28일)이었다.
 
   그동안 정부내각과 일본측은 왕비의 붕어소식이 알려져 조선국민의 반일·반개화 움직임이 있을 것을 크게 우려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의 각국 외교관들과 친러·친미 인사들이 고종을 궁성 밖으로 탈출시키려다 실패로 그치자, 그들은 이 사건이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퇴색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그리하여 10월 15일(양력 12월 1일)에 이르러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묘시(卯時)에 왕비가 승하하였다는 사실을 내각을 통해 공표하게 되었고, 이때서야 국민들은 겨우 사태의 윤곽을 감지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의 소식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파문을 몰고 왔다.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신이 추락되었음은 물론, 조선내에서는 을미사변으로 인한 국민의 적개심이 폭발하여 반일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일본의 과도한 내정간섭과 을미사변의 만행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을미사변의 객관적 조건은 청일전쟁 이후 러·일 양국 사이에 전개된 동아시아에서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장본인은 어디까지나 일본정부이다. 우선, 사건의 현장에서 일본인 순사와 낭인배를 지휘하고 직접 선두에서 만행을 저지른 것은 일본의 정규군 장교였다. 사전에 이 음모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지시한 것은 일본공사 미우라였다. 그리고 외교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는 그를 조선에 파견하여 특별한 임무를 부여한 것은 일본정부였기 때문이다. 대원군과 훈련대가 이 사건에 간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주변적 존재였고,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하여 미우라가 일시적으로 이용하였을 뿐이다. 히로시마감옥에 수감된 미우라 등 범죄인들을 일본정부에서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한 것은 바로 이듬해 1월 20일이었다. 이 사실은 일본정부가 을미사변의 장본이었음을 재삼 입증 하여주고 있다. 더욱이 히로시마감옥에서 영웅처럼 대접을 받았던 것은 당시 일본의 군·관·민 모두가 을미사변의 공범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tg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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